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국립산림과학원 재직 당시 대학이나 연구소가 대동소이하였지만, 특히 임학 및 임산학

            분야의 연구에는 참고문헌이 부족하고 연구에 소요되는 필수 분석장비나 시약들이 태부족.
            당시 상공부소속 공업시험장 제지연구실의 종이 관련 시험시설들, 인접한 한국과학기술연

            구소의 우수한 분석시설이나 장비가 그렇게도 부러웠으며,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빛바랜
            일본 임업시험장 연구보고서 및 미국 임산물연구소의 보고서, 일본의 목재공업 잡지, 펄프

            및 종이관련 紙パ技協誌야 말로 당시 소속연구원들 연구의 구세주와 같은 지침서였었다. 그
            래서 30세가 넘은 다소 늦은 나이의 나는 나홀로 공부를 중단하고 외국에 유학가서 목재학

            의 ABC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, 당시 박사과정 지도교수셨던 심종섭박사의 허락을 받

            고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었다. 분석기기 및 장비와 참고문헌에 목 말랐던 나로서는 못구하
            는 시약이 없고, 분석할 수 있는 장비들이 24시간 돌아가고 있었으며, 소요되는 물품들을 주

            문만하면 하루 이틀내로 항시 공급되는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연구 관련해서는 천국과 같
            았다. 나는 한국의 Nakano(中野準三, 당시 동경대학 지도교수님의 이름)가 되겠다는 일념으로

            불철주야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.



               필자는 학회가 창립된 지 30여년이 되던 1998년 4월, 제14대 학회장에 선임되어 학회

            를 운영하게 되었다. 당시 목재공업계는 양적‧질적으로 많이 발전을 쌓아왔지만, 국가적으
            로 IMF라는 거대한 물결로 우리나라는 크나큰 경제적 파탄 위기에 몰렸었고, 겹친 외환위

            기는 그야말로 나라를 넘어트릴 기세로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던 어려운 상황이었다. 당연
            히 우리 학회도 정부나 기업의 재정적 지원은 커녕, 관련 기업들이 도산하고 후학들이 취업

            도 안되고 정말로 어려운 위기에서 학회를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. 엎친데 덮친 문제가 생
            긴 것은 전임회장으로부터 인계인수를 받았는데, 통상은 새로 맡은 신임 회장단에게 보너스

            처럼 어느 정도의 이월금을 넘겨 주던 전례를 깨고, 4월 춘계 총회에서 받은 금년도 회비를

            전부 다 집행해 버리고 빈 통장으로 학회를 인계해 주어서 멘붕 상태로 학회운영을 시작했
            던 것이 흘러간 꿈같이 생각이 떠오른다.



               돌이켜 보면 임산학연구 분야의 발전은 1945∼1960년대를 연구와 기술개발의 태동기,

            1961∼1970년대를 연구와 기술개발의 기반 조성기, 1971∼1980년대를 연구와 기술개발
            의 분화 및 체계화기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, 1981년부터 각 분야별 새로운 자원개발 이용






            한국목재공학회 50년사            3장 기념사  |  회고록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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